11월 1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함이 경외로 이어지는 믿음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경외의 삶을 사는 데에 어떤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외’는 결코 추상적인 믿음의 모습이 아님을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외’가 인정받은 것은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던 일을 통해서였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해 칼을 들려하던 상황에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의 근원, 곧 순종의 시작은 21장에서의 상황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창 21:9에서는 하갈이 나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일이 나옵니다. 그러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마엘 역시 아브라함의 아들이었고, 길러온 인간적인 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창 21:11에서도 아브라함의 감정에 대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의 말을 들으라 말씀하시고, 근심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이 일에 순종합니다. 성경은 정말 아브라함이 아무 말 없이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2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명하셨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창 22:3의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라는 내용을 보면, 그그 묵묵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련 속의 사흘길 가운데 그의 인내는 경외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산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창 22:14) 결국 번제단에서 이삭을 향해 칼을 들어 올리던 그 순간까지도 아브라함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입니다. 창 22:1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렇게 말했고, 11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멈추게 하셨을 때에도 그의 유일한 한 마디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입니다. 게다가 7절에서 이삭이 아버지를 불렀을 때에도 그의 답은 ‘내가 여기 있노라’였습니다. 경외의 삶을 나타내는 한 마디가 바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임을 알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신앙에는 많은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인내와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 앞에 서는 자,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답하는 자가 경외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많은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경외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