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신앙 생활 가운데 인간의 자유 의지가 어느 만큼의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드러냈던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정말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보인 열심과 거룩을 어느 새 잃어버리고 죄의 유혹에 빠지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자유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크게 내세울 공로로 나타난 적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부르심 안에는 은혜만이 역사할 뿐이었습니다.
마 9:9에는 복음서의 저자인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가 단 한 구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라는 말씀을 보면, 그에게서 어떤 의지와 결단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죄인으로 지탄 받던 세리의 일을 하던 사람이었으나, 그렇다고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애를 썼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시던 길에 다만 앉아 있었을 뿐이고, 예수님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갈망도 없이 앉아있던 마태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먼저 다가가신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 9:1~8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침상에 뉘여 천장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은 마태가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과, 죄 사함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마태는 분명 전해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고, 세리로서 저지른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마태가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라는 한 말씀에 제자가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정말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뿐 아니라 어느 누가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의 은혜를 스스로의 의지로 소망하며 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각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애썼노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심령 안에 예수님의 빛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했고, 영생을 선물받은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 의지로는 죄를 짓는 것에만 쓰일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10:1에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 10:8에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권능에 우리의 의지와 노력의 지분이 없으니, 그것을 행할 때도 거저 주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아름답게 보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그 의지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의지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완악한 우리의 마음에 그 크신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은혜를 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