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행위’는 변화된 삶의 척도의 하나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삶은 당연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선함’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선함’이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선함’은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행 14:17에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며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라고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에게도 행하신 ‘선한 일’,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음식과 기쁨을 주시며 각 사람에게 만족을 주셨던 그 선한 일을 나타내는 ‘선하다’는 헬라어로 ‘아카토스(ἀγαθός)’가 쓰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단어이면서 실질적으로 남을 돕고 기쁘게 하는 선한 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 선하심을 우리가 닮아가면, 우리도 이웃을 돕고, 그들을에게 기쁨을 주는 선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 10:11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실 때에 ‘선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칼로스(καλός)입니다. 이 ’칼로스‘는 ’아름답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어, 이 선한 일은 곧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십니다. 이것이 아름답고도 선한 일입니다. 우리가 가져야할 선함에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 속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선함은 ’아카토스‘보다 ’칼로스‘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이루어진 이후, 성도들은 선한 일들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도 ’칼로스‘였습니다. 행 3:1~2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못 걷는 이를 만납니다. 행 3:6에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하고 그를 일으키자, 일어나 걷게 되면서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구걸하는 이에게 돈을 주는 선함 대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칼로스‘를 베풀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이가 구걸하던 ’미문(美門)은 성전 구조의 정식 명칭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차별이 있어서 가장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고, 그 안쪽의 ‘여인의 뜰‘을 지나여 유대인들의 성전이 있습니다. 미문은 그 바깥에 황금빛으로 장식된 문을 일컫는 말입니다. 레 21:17~18에 따라 장애를 가진 이들도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성전 휘장을 찢으신 뜻대로 바깥에 있던 이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그곳이 곧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선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에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먼저는 영혼 구원에, 그리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에 힘쓰면서, 성전의 문을 ’아름다운 문‘으로 만들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