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행 9:1~19에서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동안 자신이 행했던 일들이 예수님을 핍박했던 일임을 알게 됩니다. 사울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지키려 애썼던 율법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에 앞장서면서도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그의 ‘옳음’은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신앙은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의해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눈으로 그 가치가 분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반대로 우리는 자신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면서 회의와 자책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체된 믿음, 열매 맺지 못하는 삶에 대한 자괴감입니다.때로는 그 자괴감이 ‘찜찜함’과 같은 느낌으로 우리 삶에 오래 지속되기도 합니다. 그 ‘찜찜함’은 사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마음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상태를 숨기고 방치하다 보면 마음이 굳어져, 그 불완전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찜찜함’의 가장 큰 문제는 그 부족함을 극복하려 애써보아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괴감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결핍’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 ‘결핍’을 ‘충만함’으로 바꾸길 바라는 욕구와 갈급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결핍이 자기 힘에 의해 채워질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요일 4:12의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우리 안에 주님이 계셔야만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줄여보면, 결핍을 느끼는 ‘찜찜함’이 회복을 시작하게 하는 ‘감지기’인 셈입니다.
눅 19장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당시 세리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죄인으로 천대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부유함은 가질 수 있으나, 죄인이라는 멸시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로운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가 자신의 이름에서 보이는 의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자신의 실제 삶의 괴리에서 얼마나 힘겨워 했을 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던 삭개오는 먼 거리에서라도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실 예수님을 구경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이 오히려 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묵 19:5)라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자기 삶에 놀라운 변화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신앙은 바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하게 하는 열쇠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5)에서 ‘담대함’은 자기 신앙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우리를 다시 부르시어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담대함인 것입니다. 자괴감마저도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하는 도구로 쓰시는 은혜를 늘 의지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