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우리는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가족과의 관계나, 낯선 타인과의 관계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끼리의 교제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속에서 그 모든 관계에 대한 태도는 어떤 변화를 보였을까요?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끼리의 교제는 어떤 마음으로 이루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를 쓸 당시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관계는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교인들은 바울의 능력과 권위를 의심했고, 바울 역시 들리는 소식에 많은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3:1에서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말을 통해 고린도교회와 자신의 친밀한 관계는 추천서나 증명이 필요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 반문 안에는 확신과 아쉬움이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바울의 답변은, 그가 신앙 안에서 이 불편한 관계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려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바울은 먼저 고후 3:2에서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라고 말합니다. 서로가 마음으로 이어진 관계이며, 서로를 비추는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부정적으로 가고 있는 관계 속에서도 바울은 그들이 자신의 일부이며, 그들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후 3:3에서 그는 이 관계를 더 깊은 의미로 여기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에는 ‘우리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로 바뀐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는 것은, 이미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를 신앙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돌판에 새기지 않았다’라는 말은 율법적이며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고후 3:11에 ‘없어질 것’으로 표현한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는 영원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인간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은, 인간 관계의 기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과연 나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입니까? 벧전 3:4에서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사모하는 관계입니다. 갈 4:6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된 관계임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요 15:14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칭하십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신랑이시며, 아버지이시며,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교제는 바울의 말처럼 영원성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합니다. 이제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나누는 관계들이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하는 은혜임을 체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