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막 10:46~52에는 예수님께서 맹인 바디매오를 고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만난 것은 짧은 기록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 앞에 온전하게 나아가기 위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할지를 알게 하는 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맹인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결과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막 10:47에는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안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들린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분이 ‘나사렛 예수’로 불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미천한 지역 출신의 예수님을 인간적 기준으로 부르는 말이었고, 바디매오도 그렇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까이 오심을 안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자손’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 21:15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말을 맹인 거지가 소리 질러 말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더 크게 소리를 지른 것일까요?
바디매오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는데, 유대인들에게 이 표현은 사람을 향해 쓰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바디매오의 외침 속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이 표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위해 걸음을 멈추십니다.(마 10:49)
바디매오에게도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신의 눈을 고치는 일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실 분, 곧 하나님을 주목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이며, 사람들의 비난에도 더 소리를 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맹인을 고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자신을 고치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을 뜨게 된 순간입니다.
결국 바디매오는 눈을 고침받게 되었지만, 그대로 집으로 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마 10:52)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가 그런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큰 문제를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대하면서, 그는 그 일을 해결하실 유일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의 문제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삶의 문제에만 주목할 때에는 낙심이 있지만, 그 일을 해결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문제만큼의 믿음이 생깁니다. 바디매오는 그 믿음이 있었기에 십자가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바디매오처럼 믿음의 눈이 열리며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