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욥은 욥기 1~2장에서 재산과 자녀를 잃고, 자기 몸의 질병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욥 4장부터 그는 새로운 시험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세 명의 친구들의 방문으로 인해 겪게 되는 죄에 대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신앙을 가지고 욥의 형편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먼저 욥의 죄악을 지적하는 ‘엘리바스’는 그 이름이 ‘재판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문을 드러내는 유대의 이름 제시 방법과 다르게, 그냥 그의 역할만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가 먼저 욥에게 꺼낸 말은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였습니다.
그의 말은 구약 전체에 흐르는 ‘신명기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논리였습니다. 분명히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재앙은 죄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인과율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재앙을 당한 욥에게 매몰차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 4:17에서도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어느 한 군데 율법적으로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편에 서서 말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욥 5:17에서는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라고 강하게 다그칩니다. 욥 22:5에서는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라고 말했고, 욥 22:21에서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라고 말합니다. 또 욥 22:29에서도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의로워 보이는 말 안에는 욥의 영혼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찰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대답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였습니다. 그는 엘리바스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동안 삶 속에서 느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의 시련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연단이라고 굳게 믿은 것입니다. 그는 욥 23:14에서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라며, 확신으로 말하지만, 욥 22:17의 그의 고백은 더 귀한 신앙의 고백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라는 말 안에는 자신이 겪은 시련보다, 내적으로 겪고 있는 하나님과의 단절감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하는 거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에게 선하신 뜻을 드러내시면서 욥 앞에 나타나십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고 말하면서, 다시 한 번 회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시련을 겪는 이웃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죄에 대한 인과가 아닌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자기 스스로와 이웃에게 나누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