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마 1:1의 구절에서 ‘계보’란 ‘족보’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족보’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중요함을 보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혈통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그 족보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족보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도 믿어지게 됩니다.
성경에서 족보가 나타날 때마다 함께 드러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창 5:1에는 아담의 계보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32절까지 이어져 노아까지 쓰여진 족보는 정확히 10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창 11:10~26에는 노아의 아들 셈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도 셈으로부터 아브람까지 정확히 10대의 계보입니다. 이 사실은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이 택하신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자손을 이어간 것 같지만, 그 모든 계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 12장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계획대로 언약을 성취하시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신뢰한 그의 믿음과 의지를 우러르지만, 사실 그의 믿음의 여정에서는 어떤 거룩한 동기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창 11:30와 같이 자식이 없는 그의 상황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주목하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시련까지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 그의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75세까지 자녀가 없는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사용하셨기에 아브라함을 움직이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았고, 여전히 사람과 재물을 의지하는 모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언제 하나님의 약속을 잃게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습을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7:18에서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그의 겸손과 자족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언약에 대한 불평이고, 불신앙의 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00세에 이삭을 낳기까지의 과정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모습이었다면,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더 자신있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히 2:8에서 아직 만물이 예수님께 복종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 의미 안에는 우리 역시 예수님께 불순종하고 있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그 계획 속에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본으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믿음의 본은 예수님뿐이십니다. 다만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믿음으로 이끄신 것처럼 우리도 인도하심을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