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3일 수요예배 말씀
바울은 고전 14:1~5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 정리하여 말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문제로 인해 교회의 분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방언의 은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은사를 통해 사람들이 기도를 자랑하고 서로 우위를 비교하면서 기도의 본질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바울은 이 부분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두 가지 은사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기도에 배우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완전한 기도를 한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에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묻고, 답을 듣듯이 말입니다.
렘 12:1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라고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이는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 숨김 없이 묻는 모습은 부모에게 알고 싶은 것을 묻는 아이의 질문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렘 12:5에서 그 질문에 답을 해주고 계십니다. 기도에는 이렇듯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된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응답을 간구하는 기도를 하다보면 ‘묵상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삼상 1:13에서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라는 부분은 한나가 자녀를 주시기를 간구하며 묵상기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권면대로 방언과 예언이 기도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가르친 이유는 바로 기도의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고전 14:4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고 가르친 이유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 기도의 목적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4:14에서 방언 기도로는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권면처럼, 예언이 귀한 것은 하나님께 들은 응답으로 교회의 덕을 위해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4:15의 말씀처럼 영으로,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원하면 온전한 기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도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회개’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만 겸손하게 하나님의 응답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 8:26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한 것이 바울이 가르친 기도의 본질입니다.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는 고백이 기도를 배우게 하고 성령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에는 자기 스타일이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회개로 시작하는 겸손의 모습으로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