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시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의 시들입니다. 기도이자 찬송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시편의 내용들을 살쳐보면, 각 편마다 내용과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각자 기도의 내용이 다르듯이, 시편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더라도 그 의미가 다른 것들을 알게 되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고, 찬양해야할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시편을 보면 하나님께 호소하며,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탄식과 간절함으로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벗어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시 131:1~3의 내용 안에는 세상적인 내용에 대한 간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라는 내용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기를 간구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만으로도 시 131편은 성숙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시편의 절반 가까이는 탄식이 있는 간구의 노래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거래와도 유사합니다.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대신,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강하게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를 저급한 신앙이라 말하기에는,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가 그와 비슷하다는 성찰을 먼저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도 외면하지 않으셨기에 그 시편들이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는 그 찬양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 131편은 우리의 찬양이 나아가야할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온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야말로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가지고 싶어하는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으로 다가오셨지만 그 과정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 131편에서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고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귀한 찬양의 모습이 있습니다. 시 100편에서는 별다른 간구의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내용으로만 쓰여 있습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라는 고백은 찬양의 진수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염려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외에는 마음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만 계시면 더 바랄게 없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100편의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는 시 131편의 간구처럼 우리 마음에서 교만을 제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롬 7:24에서의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으면 마음의 싸움에서 이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만을 찬야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기도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까. 여전히 하나님께 탄식으로 요구만 하는 기도만 하고 있다면 이를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높아진 교만을 이기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만을 찬양하는 기도, 그 천국과도 같은 찬양과 기도의 삶을 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