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자신이 왜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지에 대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는 비정한 아버지인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십자가는 잔혹하고 저주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자, 은혜입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전체가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면서 가져야할 마음은 창 1:4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선하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물론이고, 우리를 지으시고 인도하시는 모든 일은 분명 ‘선한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이 선하심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습니다. 창 2:9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라는 말씀에서도 본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자기 판단대로 ‘악한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 죄악의 시작입니다.
자기 앞에 보이는 일들을 ‘악한 것’으로 여기면서 분노가 시작되고, 미움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무언가에 대해 ‘악한 것’으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먼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 마음의 죄와 관련된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위해 나아올 때마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와 관련된 마음의 죄를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의 마음이며, 제사장의 마음입니다.
출 20:26에서 하나님은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세에게 이르시는 말씀이자, 예배하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체가 드러난다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죄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옷차림이나 행실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살피는 마음으로 나아오라는 명령입니다.
눅 5:8~9에서도 예수님을 처음 만나 말씀대로 물고기를 많이 잡은 베드로에 대해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하는 마음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선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눈이 변화된 사람은 기도를 해도 무엇을 구해야할 지를 알게 됩니다. 눅 11:9~13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것에 대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가장 선하고 좋은 것, 곧 ‘성령’을 구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불평이 감사로 바뀌는 것이 예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선하게 보던 영성의 회복입니다. 언제나 부정적 마음에 틈타는 죄를 회개하시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