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가시는 곳마다 치유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마 15:21에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실 때에 찾아온 여인을 대하시는 모습은 다른 경우와 달랐습니다. 막 7:24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기록된 이 여인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이방인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치유의 과정 속에서 치유 자체가 아닌, 예수님을 향한 신앙의 모습에 대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 여인이 예수님을 뵈었을 때, 그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마 15:22)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른 채 하시고, 제자들도 그 여인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답하십니다.(마 15:24) 유대인에게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은 누구에게나 긍휼함을 베푸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도움을 호소하는 여인을 향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라는 말로 여인에게 상처가 될 말씀을 하십니다. 말 그대로 ‘개 취급’을 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 여인은 분노하며 자리를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라고 예수님께 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 여인의 딸을 고치십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마지막 말이 예수님을 움직인 것일까요?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은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이들은 랍비, 선생, 다윗의 자손 등의 말로 예수님을 찾았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을 ‘주’라 부르며 달려왔습니다. 이방의 여인이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주목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외면할 때에도, 개라 칭하실 때에도 여인은 계속 예수님을 ‘주’라 부르며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개’라 말씀하셨지만, 그 여인은 개도 결국 주인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나며, 자신의 고백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바로 그 고백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벧전 1:7에서 믿음의 시험에 대해 가르치듯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확인해야할 믿음의 과정입니다. ‘부스러기’ 같은 은혜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온 것이라면,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증거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사는 삶은 주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든지 신뢰하는 삶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주인으로 여기며 의지하려고 합니다. 이제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한 것의 의미를 되새기시면서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