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6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은 분명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보지 못한 천국과 영생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육신의 일들에 마음을 두는 일들이 늘어나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곤 합니다. 더 나아가 신앙의 중심이 육신의 일들에 집중되면서, 신앙의 기쁨과 헌신의 척도마저도 육신의 일, 크게는 재물에 두게 되기도 합니다.
시 49:6~8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시 49:6)으로 시작하는 말씀은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7~8)라고 그들의 허무한 재물 사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속전’은 누군가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는 돈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전도의 일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큰 것을 드리고 있다고 여기는 교만을 저지르곤 합니다. 그러나 시편의 이 말씀대로 생명의 값은 그 어떤 재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재물로는 다른 사람의 영혼은커녕 우리 자신의 영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시 49:9)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에 매인 사람은 죽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시 49:10~11에서는 이에 대해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라고 말합니다. 유한한 것들이 영원할 것처럼 여기고, 자신이 쌓아놓은 집과 토지가 대를 이어 자신을 증명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시 49:12의 말씀은 이 헛된 욕망에 대한 함축적인 교훈입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는 내용 속에는 사람의 존귀함이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바울도 롬 8:13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권면합니다. 영으로써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몸의 행실들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영혼이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라는 축복,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을 향한 축복입니다. 육신의 일을 잘되게 하기 위해 영혼이 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서의 결론인 전 12:13에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라고 가르칩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신의 자산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쓰일 것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일들에 기쁨을 찾으시면서, 더 풍성한 은혜를 매 순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