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까지 보이셨던 모든 모습은 예수님의 인격을 담은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땅에서의 모습과 하나하나 연결지어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예수님께 인격적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시기까지, 한 번도 직접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삶의 순간들을 예수님과 연결시키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후 4:10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가난과 고통으로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겪는 고난들을 예수님의 고난에 대입해보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것입니다. 그 고난과 순종의 길을 따라가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예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된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 후에 부활하시고, 영접하는 모든 이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도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고난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라는 바울의 믿음 역시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고후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의 겉사람이 더 나아지고 우월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전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은 겉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신 우리의 속사람인 것입니다. 고후 4:7에서 바울은 우리의 본질을 ‘질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무런 화려함도 기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역할 외에 어떤 영광도 가질 것이 없는 그 질그릇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배이신 예수님이 루이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본분입니다.
고후 4:5에서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라고 가르친 것처럼, 우리를 드러내려고 해봤자, 질그릇의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눈도 바뀌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삶을 소망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우리 안에 보배가 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