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히 12:15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 내면에 자리잡은 ‘쓴 뿌리’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쓴 뿌리’는 오랫동안 내면에 자리잡은 죄, 마음의 상처, 굳어진 생각들을 의미합니다. 깊이 자리잡으면서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이루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이 쓴 뿌리를 제거하는 일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쓴 뿌리’는 분명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쉽게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일부처럼 당연시하고 있거나, 그 부분을 누군가가 건드리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요 5:5~6에서 38년 동안 병들었던 병자에게 예수님이 물으신 말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였습니다.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자신의 ‘쓴 뿌리’를 고치고자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쓴 뿌리’를 제거한다는 것은 결국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제어할 수 없기에 ‘쓴 뿌리’인 것이며, 이 회개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모든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히 13:10~11에서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라고 이스라엘의 제사 규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브리서 자체가 히브리인 성도들을 향해 쓴 글이기에,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의 제사를 통해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의 규례에 따르면, 화목제의 제물을 제외하고 속죄제로 드리는 제물은 백성들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죄와 관계있는 것이기에 아예 죄를 담아 영문 밖으로 보내야했기 때문입니다. 레 4:21에서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불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히 13:12에는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스스로 속죄제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성문 밖 골고다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은, 구약의 시대와 달리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는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변화시키는 풍선한 은혜의 양식이 됩니다. ‘쓴 뿌리’로 자리잡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부분까지 감사와 소망으로 바꾸게 하시는 힘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쓴 뿌리’를 용서받는 삶의 기쁨을 누린 사람은 그 은혜의 십자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 13:13의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혈의 은혜를 다시 붙잡고 십자가를 향해 더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