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 ‘회개’에 대한 많은 권면을 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가운데 회심한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죄에 대해 생각했을 듯도 하지만, 바울은 분명 죄 사함을 통해 얻는 자유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회개를 이야기함은 과거에 매임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죄에 대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했는지는 롬 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을 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 모든 삶을 다 쓰고 있던 그가 죄로 인해 곤고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곤고함 속에서 죄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자책’의 감정으로 접근하지 않고 있습니다. 롬 7:20에서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주체를 자기 안에 있는 ‘죄’라고 말하는 것은 죄의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가 아니라, 죄에 매이지 않는 자유함을 얻기 위함입니다. 롬 7:15에서 바울이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라고 말한 이유는, 성령으로 거듭난 속사람에 여전히 죄가 있지만, 죄 사함의 은혜를 통해 자유케 될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서 전체에 ‘죄’라는 단어는 40번 이상 쓰이지만, 단 한 번 헬라어 상의 동사로 ‘하마르탄’이라는 단어가 쓰인 외에, 나머지 모두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는 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죄 자체에 인격을 부여하는 명사화를 통해 죄의 주체로서의 ’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죄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사함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를 통해 자신의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롬 8:1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포한 것은, 우리 안에 죄의 주체가 되는 ‘죄’의 권세보다 더 강력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자유케 하심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죄로부터 자유함에 대한 담대함을 반드시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롬 6:11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권면합니다. 죄에 대하여 자유로워질 때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로 설 수 있으며,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행 22:14에서 회심한 자신을 찾아온 아나니아에게 들은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라는 말을 통해, 자기 죄를 사하시고 사도로 택하신 은혜를 자신있게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의 능력은 우리를 과거에 매인 자가 아닌, 미래의 일꾼으로 서게 합니다. 여전히 부족해도 죄사함의 은혜를 통해 우리를 택하신 자녀로 담대히 서게 하시는 은혜를 새롭게 회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