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6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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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4 20:14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기록할 때마다 ‘길에서’라는 설명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은 많은 만남과 기적을 ‘가시던 길에서’ 이루셨습니다. 3년의공생애 동안 이스라엘 곳곳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기적을 보이셨지만, 그 모든 것은 예수님께 가시는 길의 한 부분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눅 9:51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는 말씀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십자가와 부활이 있는 곳입니다.
역시 ‘길 가실 때에’로 시작하고 있는 눅 9:57~61에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시는 무욕(無慾)의 삶을 사셨다’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 말씀은 ‘이 세상을 집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진정한 쉼이 없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만을 바라보시는 여정을 지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영생의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눅 9:59에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실 때에,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하자,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윤리적 의미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은 자’는 영생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핵심은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받음을 믿고, 이 영생의 귀함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영생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생을 알지 못하는 자가 ‘죽은 자’라면, ‘산 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눅 10:1에서 70인의 제자들을 보내심도 그들이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도 ‘산 자’입니다. 그들이 영생을 소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눅 10:38에서 예수님이 길 가실 때에 영접한 마르다의 집에도 영생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눅 13:32에서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영생이 이루어지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소명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눅 18:31에서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라는 말씀으로 그 마지막 길을 가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직 영생을 이루기 위한 길을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남은 삶을 어떤 길로 가느냐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세상에 매였던 그동안의 길을 내려놓고, 예수께서 주신 영생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헛된 소망에서 벗어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역시 ‘길 가실 때에’로 시작하고 있는 눅 9:57~61에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시는 무욕(無慾)의 삶을 사셨다’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 말씀은 ‘이 세상을 집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진정한 쉼이 없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만을 바라보시는 여정을 지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영생의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눅 9:59에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실 때에,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하자,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윤리적 의미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은 자’는 영생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핵심은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받음을 믿고, 이 영생의 귀함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영생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생을 알지 못하는 자가 ‘죽은 자’라면, ‘산 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눅 10:1에서 70인의 제자들을 보내심도 그들이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도 ‘산 자’입니다. 그들이 영생을 소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눅 10:38에서 예수님이 길 가실 때에 영접한 마르다의 집에도 영생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눅 13:32에서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영생이 이루어지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소명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눅 18:31에서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라는 말씀으로 그 마지막 길을 가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직 영생을 이루기 위한 길을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남은 삶을 어떤 길로 가느냐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세상에 매였던 그동안의 길을 내려놓고, 예수께서 주신 영생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헛된 소망에서 벗어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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