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8월 25일 금요심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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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2번까지 용서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신은 일곱 번까지 용서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율법을 넘어서는 선함을 자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칭찬 대신 하신 말씀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2)였습니다. 그 횟수는 사실 끝없음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마 18:15~17에서 예수님이 두 번의 용서에 대한 율법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와 비교하여 베드로는 자신의 선한 의지를 밝힌 것입니다. 분명 율법적인 용서의 기준에 비해서는 놀라운 차이를 말한 것인데도 예수님께서 용서의 횟수에는 끝이 없다라는 점을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잘 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반복되는 죄를 짓는 사람에 대해 세 번째에는 교회에 말하여 격리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의 영향으로부터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그 자체가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번의 용서라면 완전하지 않는가를 말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제한이 없다는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마 18:23~35에서 만 달란트 빚진 자를 용서하고 탕감하는 왕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만 달란트란 당시 이스라엘의 1년 세금을 넘어서는 엄청난 금액이기에 도저히 갚을 수 없음을 전제로 한 단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18:27)라는 말씀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비유하신 것임을 금방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결산의 때’(18:23)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통해 받음으로써 이 탕감 받은 자와 같은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탕감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28~35절에 나오는 은혜 이후의 삶입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둔 모습이 나온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이 행위의 이유는,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무엇을 위해 나아가는가의 문제에서 여전히 자신의 세속적 삶의 유지에 머물러 있는 것 때문입니다. 그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위한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의 삶이 나타나지 않으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빛을 잃게 됩니다. 그 새로운 삶의 증거가 바로 용서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고후 5:15에서 바울은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라고 예수님의 이 뜻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용서는 우리의 선함에 의해 횟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의 구원을 잊지 않은 삶에서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입니다. 이 거듭남의 삶을 이루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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