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에 대한 신앙
종말론적 신앙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폐해가 많아지면서 우리에게도 성경의 묵시적인 내용들에 대한 부담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말론과 묵시론은 엄연히 다른 의미입니다. 종말론적 관점은 이 세상이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을 단정하는 것입니다. 다만 단순히 종말론을 자기 생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자기 이익을 위해 쓰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바탕으로 사이비나 유사종교가 나타나는 사례가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시론적 관점은 이와 다릅니다. 묵시론은 끝을 향하여 가는 세상이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까를 찾는 관점입니다. 어떻게 세상이 끝나게 되며, 어떤 징표가 나타날지에 관심을 가집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께서 어려움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장차 닥쳐올 일들에 대해 메시지를 전하시는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사용되는데, 이때 나타나는 말들이 밀어(密語), 또는 비유(比喩)입니다. 밀어(비밀)는 제3자가 접근할 때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리고 그 심각성을 올바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묵시적 메시지에 대한 관심으로 ‘묵시문학’이라는 관점으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
‘묵시문학’은 천사가 가져 온 말로 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차 행복한 시대가 올 것을 믿음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고무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억압과 박해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게 평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상징적이거나 비밀적인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일지라도 오직 그 목적은 장차 다가올 희망을 위해서 지금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단편적으로 묵시문학적인 내용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 24:15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이라는 말씀 속에서 단 12:11을 인용하시면서 묵시적 말씀들이 예수님 이후에도 여전히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신약 성격 가운데 묵시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내용은 ‘유다서’입니다. 유다서가 가진 이해의 난점이 바로 이 묵시적 내용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라는 말씀에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주시던 묵시의 목적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역사의 시작을 알고 있으나, 그 역사의 완성(역사의 종말)을 향해 가는 징표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무화과 나무를 가리키시며 시대의 징표를 알라고 제자들에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묵시를 멀리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복음으로 해석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보여주신 구원의 표징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신앙의 중요한 부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